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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란 무엇인가?

불교적인 관점에서 '느낌'의 본질은 온갖 감정과 느낌이 자연스럽게 일어나지만, 이를 그냥 허용하고 해석하지 않으면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교에서는 감정을 우리의 참된 본성과 연결시키지 않으며, 감정이 있는 그대로 통찰하고 깨어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느낌이란?

감정과 느낌을 정확히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며, 감정을 인식하지만 해석하지 않고 허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감정과 생각을 구분하여 생각으로 싫은 느낌을 좋은 것처럼 재해석할 수 있다.

 

느낌은 경험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생겨나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느낌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종종 느낌과 감정을 실제라고 여기며, 이것들을 내 것이라 여긴다.

 

느낌을 멸하는 것은 느낌이 일어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느낌에 사로잡히지 않고 끌려다니지 않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느낌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에 대한 대부분의 분석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집착과 괴로움의 원인은 애착과 불쾌함에서 비롯된다. 감정 표현에는 애착과 불쾌함 이외에 나머지 수많은 표현이 있으며, 한국어는 430여 가지, 영어는 2,600가지가 있다.

 

쾌감과 불쾌감에 대한 표현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특히 불쾌감을 더 자주 이름 짓는다. 명확하게 느끼기 전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 감정을 지켜보다가, 이후에 적절한 이름을 붙여서 재해석하는 것이 좋다.

 

감정을 인식하되, 해석하지 않고 허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5대 감정은 모두 얼굴에 드러난다. 특히 행복, 슬픔, 분노, 공포, 혐오에 대한 감정이 대표적이다. 감정이 일어날 때, 일단 기본적인 느낌 그 자체를 그냥 허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을 인식하지만, 해석하지 않고 허용함으로써, 온갖 분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감정과 생각이 가장 중요한 마음의 두 작용이다. 감정이 생각을 누르는 사람이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으며, 감정적인 사람들도 있다.

 

감정과 생각을 분리한다면 생각으로 싫은 느낌이 좋은 것과 같이 느껴질 수 있다. 생각과 감정은 서로 상호작용하여 나쁜 느낌일지라도 또 다른 생각에서는 큰 성취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생각과 감정의 연결이 계속된다면 나쁜 느낌도 좋은 것처럼 느껴질 뿐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따라서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생각과 감정을 분리하여 조절하면 도움이 될 수 있다.

 

인연에 따라 느끼는 느낌은 고정되지 않으며, 해석은 영향을 받는다. 단지 느낌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좋은 느낌도 통찰하고, 싫은 느낌도 통찰한다. 인연은 모이고, 흩어지지만, 경험과 분별 의식이 그 느낌에 영향을 준다. 불교에서는 좋은 느낌이 나타나도 싫다고 취하지 않고, 싫은 느낌이 나타나도 거부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따지지 않고 그 것을 올바르게 통찰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긍정적인 것들을 최대한 노력해 갈고닦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더 잘하지 못한 사람들이 생기면 차별과 난임이 생기게 되며, 사람들 사이에서 분열이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균형과 조화에 맞게 번뇌와 판단 없이 삶의 모든 것이 깨어 있는 상태를 추구하자. 모든 것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인생을 경험하자.

 

지혜로운 사람이란?

불교에서 하나의 진실의 눈뜨기와 계율을 지키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진리는 둘로 나누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종교든 불교처럼 '하나의 법'을 지향하는 신앙이든 하나의 진실에서 눈을 뜬다. 불교에서는 좋은 것은 취하고 싫은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둘로 나누는 것을 잘해서 최상의 것을 취하고, 계율을 잘 지키되 잘 범할 줄도 아는 것이 지혜롭다고 교리를 전한다.

 

따라서 불교는 잘못했는지 제대로했는지 판단하기 위해서 '넌 잘못했어'라거나 '넌 잘했어'라고 말하고 이를 판결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고 말하며, 이것이 공부의 핵심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감정을 인연에 따라 받아들이고, '내가 아니다'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감정이 그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대부분은 불쾌한 감정이 많이 드는 듯하다. 이러한 감정은 우리가 '나는 못난 사람인가', '이렇게 비겁하고 소심한 사람이구나'라는 편견을 가지게 되어 스스로를 비하하는 감정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인연에 따라와서 인연에 따라가기 때문에 '내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인연에 따라서 생긴 감정을 이제는 받아들이고, 제대로 다가가자.

 

부모님의 장례식에서 법륜 스님의 책에서 읽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장례식 중에 울다가 갑자기 방귀를 뽕 뀌면서 웃음이 터지는 상황을 경험하였다. 이런 이상한 상황에서도 다른 인연에서 웃음을 짓는 것을 깨달았다. 부모님의 돌아가신 것에 대한 괴로움은 절대적인 감정이지만, 웃음의 감정 또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정은 모두 정체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며, 그 위에 어떠한 감정도 올 수 있는 바탕이 필요하다. 감정을 나타내기 위한 바탕은 특정 감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상태여야 하며, 그 위에 무엇이든 올릴 수 있는 상태이다. 감정은 인연 따라왔다 갔다 하며 순간적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상황이 바뀌면 다른 감정으로 바뀔 수도 있다.

 

이러한 감정 변화를 허용하기 위해서는 감정 상태에 대한 수용과 인식만을 제공하는 바탕 상태가 필요하다. 감정을 규정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으며, 특정 감정은 그 대상의 정체성과는 무관하게 올 수 있기 때문에 바탕 상태에서의 이해가 필요하다.

 

모든 감정을 자유롭게 경험하며 허용함으로써 내면 성장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을 위해 자신의 감정적 바탕을 고민해 봐야 한다. 자신의 감정적 바탕을 잘 이해하면, 감정에만 사로잡히거나 강박적인 행동을 할 필요가 줄어들게 된다. 이를 위해선 감정 반사를 자동으로 일으키지 않고, 감정이 나올 때 이를 한번 느끼고 해석이나 판단 없이 허용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유로운 감정체험과 나 자신에 대한 이해가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자신감 하락을 방지하고 가치관을 반영한 감정성장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TV를 보다가 싫은 사람이 나오거나 싫은 장면이 나오면 채널을 바로 바꾸는 행동은 싫다는 감정에 매우 얽매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힘들고 피곤한 상황이 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주변 사람들도 힘들 수 있다. 특정한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대체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고, 그냥 해당 감정을 그대로 경험해 주면 된다. 감정을 판단하거나 분별하지 않고 그저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소리를 경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쾌하거나 기쁜 경험은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신수심법은 그렇게 일어나는 걸 허용하고 그냥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법은 대상이나 존재의 의미이며, 진리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애쓰지 않고 멈추고 보며 직관을 통해 법 진리에 깨닫게 된다.

 

감정의 허용

감정을 해석하고 분별하며 나를 규정하며 살아온 경험 느낌을 해석하고 느낌에 따라 나를 규정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힘들고 유의조작이었다.

 

감정에 대한 분별과 해석으로 나 자신을 규정했기 때문에 우울, 절망, 공허함, 외로움 등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리기도 했다. 좋은 감정은 더 많이 얻고 싶고, 싫은 감정은 없애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나를 더 얻기 위한 노력을 한다.

 

좋은 사람은 더 잘 노력하고, 나쁜 사람은 노력 못하는 사람으로 규정되는 경향이 있다. 종교에서도 율법을 따르는 사람은 좋은 사람, 어기는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경향이 있다.

 

인연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감정은 '진짜 자신'과는 무관하다. 감정이 오고 갈 뿐, 존재는 그 인연 따라 바뀐다. 다리가 불편하다, 허리가 아프다 같은 느낌도 인연에 따라 자연스레 변하는 것이다. 불온한 감정도 마찬가지로 인연에 따라서 오고 가기 때문에, 인연 따라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열의 여, 불생 등은 실체가 없이 인연에 따라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짜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진리는 부증불감, 불생, 불멸, 부정 같은 것에 있다.

 

'왔다 간다'는 감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감정은 오고 가는 것이며, 이는 진정한 본질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태어나서 오고 가는 것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좋은 경험을 추구하는데 관심이 있다. 따라서 왔다 가는 감정에만 집착하며 살아온 것을 되돌아보면, 이는 2600개 감정 중 26개의 분별로 인해 우리 삶이 불편해지고 어려워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음공부는 분별에 따라 감정에 휘청이며 살기보다는, 모든 감정을 오고 가도록 허용하며 자기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이 좋다. 감정을 알아차린 후, 그 감정에 대한 해석은 자기 분별이 아니라 그저 응답일 뿐이다. 그 뒤로 오고 가는 모든 것이 허용되는 자리가 생기며,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초기 불교에서는 오고 가는 것 자체를 깨닫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감정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며 법인을 통한 자유를 얻는 방법 감정을 허용하고 붙잡지 않으며, 법인을 통해서 자유를 얻는 방법인 것이다. 감정을 붙잡거나 버리려 하면 괴로움을 가져온다. 법인을 통한 자유란 분별에서 벗어나면서 묶긴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감정을 허용하면서 법인 개념을 통찰하게 된다면 삶을 조금 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불교에서 처음 가야 할 선에서는 '요만큼 가면 돼.'라는 화성의 비유처럼 중간에 목표를 찍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법화경은 중간목표를 만드는 것에 대한 가르침을 갖고 있으며, 분별력과 괴로움 없는 생활을 지향한다. 또 선의 방편이 견성 자성과 같은 임시방편일 뿐이며, 성장을 위해 다른 열반의 세계나 해탈의 세계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핵심을 전한다.

 

상사나 상대방에 대해 선을 넘았을 때, 상대방이 내게 말을 하는 것에 대해 귀 기울이고 서로 배려하는 인간관계를 갖자.

어떠한 명령도 받아들이면서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도 평등하게 대할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억압적인 지시나 위협으로만 나아가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그러한 사람을 응징하지 않고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