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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의 다양성과 교훈 1편

반야바라밀이라는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고 했어요. 분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적으로 내가 아는 공부가 아니다 이랬어요. 그런데 법문을 듣고서 일단 먼저 아르마리로는 알겠어요 이렇게 얘기를 해요. 사람들이 당연히 그게 먼저예요. 먼저 법문을 듣고 머리로 이해가 먼저 돼야 돼요. 머리로 이해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극치에 달했을 때 이것을 해요, 라는 말을 써요. 아는 깨달음이라는 거예요. 그런 식의 표현을 오라는 의음을 굳이 붙인 이유가 뭐겠어요. 먼저 분명히 알아야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보면 머리로는 알았는데 이게 뭔가 이게 삶으로 채화되지는 않는 경우들이 있어요.

 

공부하는 자세

그런데 이게 확실하게 알아지고 나면 그것이 점차점차 분명해져서 확실하게 알아지고 나면 삶에서도 저절로 실천이 되어버리는 경우들이 있을 거예요.

 

예를 들어 내가 몸에 안 좋은 음식인지 분명히 알았어요. 머리로는 알았어요. 그 음식 먹으면 안 돼, 머리로는 알았지만 오래 먹던 습관 있잖아요. 안 좋은 음식인데 입에는 맛있는 습관. 술 담배 하는 사람도 그렇겠죠. 머리로는 이거 계속하면 안 되라고 알지만 습의 힘이 더 큰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아는 어떤 고사님은 폐암이 걸려서 좀 더 심해지면 죽을 수도 있다고 판정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이분은 담배를 잠깐 끊었다가 결국엔 다시 피우세요. 그래서 여쭤봤더니 폐암이라는 건 알았는데 진단명을 들어서 알았어요. 알았는데 엄습이 더 큰 거예요. 담배 피우던 엄습이 더 커가지고 내가 담배를 끊고 죽을 것 같은 이렇게 살다가 죽느니 차라리 담배 마음껏 피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 게 더 나타나하면서 담배를 못 끊더란 말이죠.

 

이 업습이라는 게 이렇게 강력하게 우리를 통제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처음에는 이 법문을 듣고 어느 정도는 알겠다. 집착 내려놔야 되는지 알겠다. 과도한 욕심 버려야 되는 거 알겠다. 무집착해야 되는 거 알겠다. 이렇게 이제 시작한단 말이에요. 그렇게 공부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게 공부를 하다가 이제 이것이 공부를 계속 하다 보면 처음에는 '이야, 정말이네, 정말이네' 하고 정말 부처님 가르치면 대단하구나 너무나도 아름답구나 감동을 해요. 그러다가 법문 안 듣고 나면 이제 또 일상생활에서는 또 욕심부리고 또 집착하고 또 화내고 이렇게 반복해요.

 

처음에 그렇게 하다가 보면 이제 점차점차 이것이 어떻게 되냐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온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이게 이제 머리로 '정말이네, 정말이네' 하고 이해하던 것이 이제는 가슴으로 소화가 되기 시작해요. '정말이네, 정말이네' 하고 가슴이 저절로 먼저 동의가 돼요. 그냥 저절로 동의가 돼버려요.

 

'정말 그렇구나' 하는 것이. 그리고 이것이 오래오래 시간이 지나야지만 그게 내 업으로서 내 업식으로서 삶으로서 체화가 돼요. 아까 말했듯이, 그 담배를 몇십 년 피던 분이 담배를 끊는 게 하루아침에 되겠습니까? 하루아침에 안 된단 말이에요. 그것처럼 우리가 업습을 따라가던 습관, 생각만 우선하며 살아가던 습관이 너무 강하다 보니까 오래오래 공부해야 되는 거예요.

 

이 공부가 그래서 이제 많은 공부인들이 어떤 딜레마에 빠져 있느냐면, 여기서도 이제 그 반야바라밀이라는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머리로는 모를 뿐 하고, 오직 모를 뿐 숭산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머리로는' 모르겠다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 공부는 모를 뿐 하고 하는 거예요.

 

다양한 법문 이해 방법

 

첫째, 그래서 이제 공부인들이 넘어지기 쉬운 지점 이걸 잘 알아서야 되는 게 뭐냐면 다 그래요 다. 이거 하지 말라고 얘기를 몇 번을 해도 안 돼요. 그게 뭐냐면 첫째, 내가 내 공부가 어느 정도 왔을까를 판단하지 말아야 돼요. 내가 벌써 2년, 3년 공부했는데 2년, 3년 법문 들었는데 아직까지도 왜 이 정도죠? 아직도 왜 이 정도죠? 물론 한편으로 보면 이럴 거예요.

 

한편으로 보면 내가 이렇게 공부했는데 왜 아직 이렇게밖에 안 되지? 왜 이렇게 자유자재하지 못하지 싶고.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옛날에 비해서는 그래도 많이 쉬워졌다, 많이 편해졌다, 많이 자유로워졌다..이런 것도 충분히 동시에 느껴요. 분명히 그래요. 이럴 수밖에 없어요. 한편으로는 공부가 안 된 것 같아요.

 

근데 한편으로 돌이켜보면 이렇게 분명히 내 공부가 됐는데 반드시 이렇게 돼요. 그런데 우리는 확인받고 싶어 해요. 내가 공부가 어느 지점까지 갔을까, 몇 퍼센트 공부가 완성됐을까. 그걸 확인받고 싶어 해요. 그게 뭔지 아세요? 내가 공부라는 거예요, 나라는 아상이 공부라는 거예요. 내가 공부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공부하려는 나가 사라지는 건데, 내가 공부하려고 하니까 내가 얼마큼 공부가 됐을까, 내가 얼마큼 업장 소멸이 됐을까. 이거를 자꾸 찾는단 말이에요.

 

그게 우리의 공부를 오히려 거꾸로 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내가 얼만큼 공부 됐지 하는 것을 내려놓으세요. 그래서 그냥 할 뿐 이래야 돼요. 공부할 때는 그냥 공부할 뿐이다. 내가 얼마큼 됐을까를 난 묻지 않겠다, 따지지 않겠다. 그냥 공부하겠다 하고, 첫째 공부한다.

 

심지어 이제 우리가 공부를 하다가 보면 어느 순간 법문을 듣다가 대부분 그래요. 법문을 듣다가 어떤 절차를 거치냐면, 처음에는 법문을 듣다 보니까 재미도 있어요. 제가 다양한 얘기들을 하잖아요. 또 다양한 비유를 들잖아요. 다양한 비유를 드는 이유가 있어요.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보면 육조해능스님 밑에 오 가 칠종이라고 해서 종파가 벌어졌는데, 그 가운데 상당히 유력했던 종파 중에 하나가 위양종이라고 해서 위산 앙산 스님이 계시던 종파예요.

 

유명한 종파였는데, 거기 중에 이제 앙산 스님 제자인데 더 큰 안목이 더 발 같은 스님이에요. 근데 그 앙산 스님께서 어떤 말을 했냐면, 석두 스님의 문화에서는 순금, 금은빵과도 같아서, 오로지 순금만을 팔고 있다. 금은빵과도 갔다, 순금만을 판다. 이 말은 뭐냐면, 오직 법 하나만을 계속 드러낸다. 그래서 다른 방편 이런 얘기 일체하지 않는다.

 

오로지 법 하나만 든다. 예를 들면 어떤 스님은 제자가 찾아가면 항상 손가락만 들었어요. 이것이다. 어떤 분은 항상 주장자만 때릴 수도 있고, 어떤 분은 그냥 늘 떨앞에서 안 나오면 얘기할 수도 있고, 저마다 자신의 방편이 있단 말이에요..

 

그냥 딱 법 하나만 그냥 드러내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이 앙산 스님이 그러세요. 내가 법회를 하는 이 회상은 그냥 그런 순금만을 파는 금은빵이 아니라 자파상과 같아서, 이 괴로움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 괴로움에 맞는 약을 주고, 저 괴로움이 있는 사람에게는 저 괴로움에 맞는 약을 주고, 온갖 것들을 다 판다.

 

사람들이 필요한 것들을 다 파는 사람들의 괴로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모든 약을 다 파는, 그런 자파상과도 갔다 이런 표현을 하셨는데 어찌 보면, 부처님도 그러셨던 분인 것 같아요. 부처님도 다양한 근기의 사람들에게 다양한 양약을 주면서 근기에 따른 법문을 해주면서 다양한 법문을 설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다양한 가르침을 불교에서는 많은 스님들이 설하신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많은 불자들은 이렇게 btn tv라든지 이런 걸 보면서 자기가 자기 근기에 따라 끌리는 법문이 달라요. 처음에는 내가 기복적인 불교가 필요한 만큼의 아직 뭔가 부처님 뭘 이루게 해 주세요 하는 게 더 필요할 때는 그 기복적인 법문으로 하는 스님들의 법문이 더 많이 들린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게 수준 낮고 높은 것도 아니에요. 그냥 저마다 다른 거예요.

 

아직 가는 길이 아직 다른 거예요. 그때는 그 법문이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내 의식수준보다 한 발쯤 앞서 있는 의식 수준의 법문이 더 와닿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btn에서는 온갖 다양한 정말 앙산스님이 계시는 자파상 같이 다양한 기복의 방편의 법문, 연불의 법문, 독경의 법문, 무슨 수행의 법문, 또는 선의 법문, 가나선의 법문, 조사선의 법문, 온갖 다양한 법문들을 우리는 다 마주할 수 있단 말이죠. 이런 온갖 방편들이 다 있으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많은 신도님들이 자기의 맞는 법문들을 듣기 시작해요. 아마 여러분도 다 그런 과정을 겪으셨을 거예요. 처음엔 그런 법문을 듣다가 어느 순간 이게 조금 이렇게 이제 이게 충분히 충족이 됐단 말이에요. 그러면 신기하게 한 단계 내 수준이 딱 이렇게 이걸 털어버리고 나면 그다음 공부를 하게 돼요.

 

그러면 그 다음 공부를 안 내줄 만한 분들의 법문이 또 끌려요. 그럼 그 법문을 듣다가 이렇게 차츰차츰 공부가 이렇게 성장을 한단 말이죠. 그렇게 성장하면서 법문을 들어요. 그러면서 이 법문을 듣는 사람들이 이런 말들을 하세요. 처음에는 이게 법문이. 재미있어서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법문을 듣다 보니까 내 삶의 괴로움의 문제가 해결이 되니까, '아, 내가 마음을 이렇게 쓰니까 이 괴로움이 해결되는구나.' '마음을 저렇게 쓰니까 아, 이 괴로움이 해결되는구나.' 해서 괴로움이 사라지니까 너무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그게 좋으니까, 이제 법문을 듣는 거예요.

 

법문 체화과정

그렇게 이제 법문을 듣다가 이제 많은 분들이 그러세요 보면 보통은 그럴 거예요. 이제 법문을 듣다가 한 70% 80% 정도는 그럴 거예요. 이렇게 그냥 법문이 재미있으니까 법문을 듣다가 어느 날 법문을 듣는 것이 달라지는 순간이 와요. 어떻게 달라지느냐 하면 법문이 재미있어서 듣다가 어느 이제 도약이 일어나냐 하면 문득 법문을 듣는 자세가 달라지기 시작해요.

 

어떻게 달라지기 시작하냐면 내가 하나하나의 괴로움을 해결하려고 법문을 듣는데 머리로는 알겠다. 머리로는 알겠지만 이게 확 소화가 안 되는 것 같아. 왜? 이게 쉽게 말해 틈이 있어요. 현실을 딱 쳐서 괴로움이 왔는데 먼저 집착을 하고 나서 먼저 화를 내고 나서 시간이 지난 다음에 틈이 있는 거에 간격이 벌어져요.

 

시간이 지난 다음에 아차 내가 또 놓쳤구나. 또 분별 쫓아갔구나. 또 생각 따라갔구나. 또 화에 끌려갔구나. 그러고 나서 다시 마음을 관찰하고는 '아, 이것도 실체가 아닌데 이런 속삭임이 있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다시 이제 딱 이 자리로 돌아온단 말이에요. 이렇게 이제 틈이 벌어지다가 이게 이제 점점 가까워진단 말이에요.

 

그럼 이제 머리로만 알던 게 정말 진실로 그렇게 계속 듣다 보면 저절로 이렇게 체화가 되기 시작해요. 그래서 이게 이제 정법 훈습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동안 영법 훈습이라고 해서 분별에 오염된 분별심만 훈습하며. 살아왔어요. 지금까지 그러니까 분별에 익숙했던 거예요.

 

그런데 법문을 꾸준히 듣는다라는 것, 절에 계속 다닌다는 것, 기도 수행을 계속 한다는 것도 똑같이 정법을 훈숲하는 과정이에요. 법문을 듣는다라는 건 가장 위대한 정법을 훈숲하는 과정이에요. 그러니까 부처님은 끊임없이 평생 법문을 설하신 분이잖아요. 부처님의 평생의 일과는 뭐였어요? 평생 법문을 설하신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정법을 훈숲하려면 내 나이만큼의 세월 동안 영법 훈숲, 오염된 분별만 훈숲하고 살다가 이제 딱 전환이 시작된 거예요. 그래서 이제 정법 훈숲이 시작됐단 말이에요.

 

깨달음의 체험이라는 건 왔다 간단 말이, 반드시 왔다 가고 나면 모든 깨달았다 하는 도인들이 견성을 했다 하는 사람들이 전부 다 똑같은 지점에서 10년씩, 20년씩 괴로워하면서 넘어지는 지점이 있어요. 그게 어떤 지점이냐면 뭐지? 옛날에 그 성성했던 의식이 왜 사라졌지? 그래서 잡았는데 놓쳤다는 거예요.

 

내가 분명히 깨달은 것 같은데 사라졌다, 없어졌다. 그러면서 이제 어떤 경우가 있냐면 옛날에 깨달았다고 분명히 했던 사람인데 아, 아니었던 것 같아. 시간, 지금 보니까 아니었던 것 같아. 아, 난 못 깨달았어. 이렇게 이제 다시 꼬리를 내려요. 왜 그럴까요? 깨달았어도 깨달았다는 걸 본인 스스로 자증자오가 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