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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의 다양성과 교훈 2편

우린 부처님에 대한 그런 얘기 많이 듣잖아요. 부처님이 위대하신 이유는 뭐냐면 부처님 제자들은 부처님에게 항상 점검을 받아야 돼요. 불교 경전에 보면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제자가 '부처님, 저는 아라안과를 중등 못한 것 같아요' 부처님이 '너 아라안이야? 아닌 것 같은데요? 맞다니까?' 이렇게 얘기하는 일들이 있었어요. 부처님이 인과를 해줘야 된단 말이에요.

 

즉, 그 말은 뭐겠어요? 본인 스스로는 모를 수도 있다는 거예요. 대부분이 본인 스스로는 잘 몰라요. 그러니까 스승을 찾아가서 확인받는 거예요. 우리나라 큰 스님들이라고 알려졌던 많은 큰 스님들도 본인이 깨닫고 나서도 더 많은 큰 스님들을 자꾸 찾아다니면서 자꾸 점검을 한단 말이에요. 왜 점검을 할까요? 부처님같이 됐다면 그러지 않겠죠.

 

깨달음의 과정

분명히 스스로 내가 부처구나라는 확실히 누구한테 물을 필요 없이 증명할 필요 없이 분명히 확실하면 그러지 않는단 말이에요. 근데 그렇게 한다는 건 역으로 무슨 말이겠어요? 긴가민가 하는 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지점에서 전부 다 무너져 내려요.

 

내 공부가 부족하구나, 내가 공부가 잘못되고 있나? 내가 공부를 못하고 있나?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뭐를 추구하느냐 하면 성성하게 깨어있는 의식이 계속 있어야 돼. 옛날에 있었던 그런 것을 깨달음이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이 평상심이 깨달음이라고 생각을 못해요.

 

또 현실적으로 깨달은 도인이라면 아프지도 않아야 될 거야. 문제 있는 일도 없어질 거야. 괴로움도 없어질 거야. 삶이 막 술술술 풀려나갈 거야. 뭔가 마음 속에서 미진함이 없을 거야. 뭔가 찜찜함이 없을 거야. 항상 깨어있는 의식일 거야. 화도 잘 안 날 거야. 급하던 성격인 사람이 갑자기 느긋해질 거야.

 

그래야지만 도인이 되는 것일 거라고 믿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본인을 비교해 보니까 나는 아직 멀었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대부분 저는 왜 이렇게 공부가 여물지가 않죠? 공부가 익어가지가 않죠? 이렇게 다 물어봐요. 그러면 물어보면 다들 그 지점이에요. 자기가 깨달음은 이런 거라고 해서 딱 상을 만들어 놓고 법상을 딱 세우는 다음에 그대로 안 되니까 내가 문제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에요.

 

근데 그러다가 한탕 넘어서는 때가 언제냐면 그게 바로 뭐냐면 내가 공부하는 거예요. 아직까지도 그래서 여러분 예를 들어 견성했다, 견성이란 말도 참 우습지만 그냥 입문한 거지만 자기 성폭력을 확인했다는 사람이 넘어지는 큰 문제점이 뭐랄까 괴로움이 또 이 지점이 있어요. 자기가 성폭력을 확인하고 나면요 신도님들 정말 많이 그러세요, 입이 근질해서 못 참겠대요.

 

옆에 사람에게 얘기해 주고 싶어서 도반들한테 말하고 싶어서 이야 내가 이거 알았다 이야 이제 내가 스님 법문 이해가 확 이해가 된다 막 너무 말해주고 싶어 죽을 것 같대요 근데 저희 할아버지 용성 스님께서 그러셨어요, 수행은 비묘 엄밀하게 해야 된다 비밀스럽게 공부해야지 내 공부를 떠벌려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자기 아상이에요,

 

도인상 내가 깨달은 건 아직 깨달은 게 아니에요. 깨달은 내가 사라지는 거지 그러니까 자꾸 내가 깨달았다라는 어떤 이 상에 빠진단 말이에요. 여전히 공부가 미진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깨달음 이후의 보임이라는 것을 한동안 내가 살아가지고 공부를 하게 돼요. 그러니까 내 공부가 미진해 내가 아직 성성하지 못해 내가 여전히 삶이 뭔가 이렇게 내가 뜻하는 바대로 잘 안 돼 순탄하지가 않아 내가 미진한 것 같아 이렇게 빠진단 말이죠. 그게 정상입니다 그게 정상이란 말이에요.

 

그렇게 10년, 20년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공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공부를 잘 못하는 거 아닌가? 1년, 2년, 3년 공부하고 나서 내가 공부가 부족한 거 아닌가? 왜 내 공부가 이렇게 잘하지 않지? 이런단 말이에요. 10년도 안 하고서 그런단 말이죠. 근데 그것은 정상적이다. 정상적이다. 그러면서 자꾸만 내가 '공부를 한다'라는 그거를 돌아볼 줄 알아야 돼요. 자기를 '아, 여기 허물이 있었구나'를 그러고 나면 사라지겠죠.

 

법문의 깊이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내가 무언가를 얻겠다'라는 생각에 놔지지 않겠어요? 이게 뭘로 놔지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소도 사라지고, 나도 사라져요. '나와 소가 같이 소라는 게 깨달음'이에요. 시부도에서 소를 발견한단 말이에요. 그러다 소를 키운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내가 사라지면서 소도 같이 사라진단 말이에요. 깨달음이라는 게 사라져요. 공부라는 게 사라져요. 나라는 게 사라져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삶이, 눈앞에 삶이 딱 드러난단 말이에요. 이 평범하던 삶이 그냥 눈앞에, 이 삶이 이대로 완성이구나..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연기직공, 반야바라밀이라는 게 눈앞에 여기 100% 반야바라밀이 드러나 있구나. 이걸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아니에요. 이렇게 말할 필요도 없어요. 이거를 '내가 공부가 됐다', '이게 반야바라밀이다', '이거 다 말이잖아요' 그런 얘기를 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평범하게 사는 거예요.

 

'내가 공부하는 사람이다', '공부인이다' 이런 생각도 없어요. 그냥 살지. 법을 설명할 인연이 되니까 그냥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겠지. 따로 '법'이라는 생각도 없단 말이에요. 왜 그럴까요? 눈앞이니까. 눈앞에 이미 완전했었구나. 이미 완전했었구나. '내가 머리로 현실적으로 내 인생은 이렇게 되면 좀 더 행복할 거야', '저렇게 되면 좀 더 행복할 거야', '뭔가 막 추구하던 게 있잖아요? 현실적으로도 추구하는 게 있고 공부적으로도'. 추구하던 게 있단 말이에요. 그게 내려놓아진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문득 평범해지는 거예요. 평상심이란 말이에요. 평상심, 그 전에 늘 가지고 있던 이 평상심이란 말이에요. 이대로 문제 있는 이대로 문제가 없었구나. 그걸 확인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공부는 점수적인 측면이 있는 거예요. 도노 후 점수, 점수적인 측면이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진우 스님이나 이런 분들도 도노 후 점수야말로 만가지 공부인들의 어떤 괴치과도 같다. 우리 현실적인 삶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깨달았냐, 깨닫지 못했냐. 이거는 내가 깨달았나 못 깨달았나 규정하려고 하지 마시란 말이에요. 확인하려고 할 필요도 없단 말이에요.

 

그냥 공부할 뿐. 깨달았다라는 상 주고 있는 게 얼마나 큰 상인 데요. 그리고 깨달은 것도 다 달라요. 사람마다 당연하지 않을까요? 수행 방법마다 다르고요. 자기 업식마다 다르고요. 우리는 깨달음에 센 체험이 있으면 좋다고 여기지만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수행을 한 사람은 체험이 더 세게 올 수도 있어요. 또 그냥 평범하게 공부하던 사람은 평범하게 오기도 해요. 또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서양에 깨달았다는 사람들처럼 너무 괴로운 속에서 자다 일어났는데 깨달은 이런 사람들도 있어요. 그야말로 우리가 바늘구멍만큼 뚫렸다 이런 소리를 해요..

 

뭔가 확 뚫린 게 아니라 통밑이 쑥 빠졌다 이런 표현이라기보다도 그냥 바늘구멍만큼 빠진 거 뚫린 거 같다 이런 식의 표현을 하기도 한단 말이에요. 아주 착하게 이거 내가 알겠다 싶은데 이게 맞나? 긴가민가하는 그런 왔다 갔다 하는 시간 그 시간을 오래오래 보낸다니까요. 심지어 확 깨달은 체험이 세게 온 사람조차 그런단 말이에요.

 

왔다. 갔다 하는 시간, 긴가민가하는 시간들을 보내요. 그러니까 이게 긴가민가 신경 끄란 말이죠. 그게 다 내가 공부하는 거잖아요. 내가 깨달았냐, 안 깨달았냐 이게 궁금한 거잖아요.

 

이 공부는 그냥 꾸준히 법문을 듣다 보면 사홍서원의 세 번째가 법례를 다 끊어오리다. 중생을 다 건져오리다. 법문을 다 들여오리다. 불또를 다 이루어오리다. 법례를 끊고 중생을 구제하려면 법문을 들으면 불토를 이루게 돼요. 저절로 내가 간절함이 사무쳐져서 그러니까 공부는 저절로 될 수밖에 없어요. 반드시 될 수밖에 없어요.

 

안 되는 사람이 1도 없습니다. 다른 공부는 이 세상 공부는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어요. 머리가 좀 나쁜 사람은 공부는 절대 안 돼요. 운동신경이 없는 사람은 운동으로는 소질이 없는 사람은 안 돼요. 음악적 소양이 없는 사람은 가수가 될 수 없어요. 다 그렇잖아요. 소질이 있어야 되거든요. 딱 하나 이 공부는 100% 다 돼요. 왜냐하면 지금 100% 전부 다 서울에 와 있기 때문에 서울에서 서울을 찾고 있기 때문에 머리를 가지고 머리를 찾고 있기 때문에 눈을 가지고 눈을 지금 보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완벽하게 부처를 쓰고 있단 말이에요.

 

부처가 아니면 어떻게 지금 제 얘기를 듣고 있어요, 어떻게 이걸 볼 수가 있겠어요. 완벽하게 부처를 쓰고 살고 있기 때문에 100% 부처란 말이에요. 우리는 그러니까 이거는 안 될 수가 없는 공부예요. 처음엔 머리로 알겠다 하는데, 머리로 안게 나중에 정말 정말 그 얘기를 계속 듣고 계속 듣고 계속 공부를 하다 보면 와 정말 알겠다 하고 막 박수가 쳐지면서 맞아 맞아 맞아하면서 가슴이 가슴으로 소화가 돼요. 정말 정말 그렇네, 정말 그렇네. 해줘요 이게 막 공명이 돼요.

 

정말 여기 계신 스님들, 나또한 말이다 하는 이렇게 막 가슴으로 그냥 동의가 돼요. 그냥 저절로 동의가 돼요. 그러면서 점점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렇게 내려온단 말이에요. 소화가 되기 시작한단 말이에요. 그러다 보면 소화되는 게 깊이가 달라져요. 이제 조금 더 소화가 되고, 조금 더 소화가 되고, 법문도 이제 자꾸 들리게 돼요.

 

자기 수용

법문을 들리는 안목이 달라져요. 옛날에는 여기까지 들리다가 그다음에는 안 들리는데, 그 다음에는 그다음까지 들린단 말이에요. 이걸 이제 가나선에서는 공안선에서는 공안을 자꾸 준다는 말이에요. 화두 하나 탑 화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풀리지 않은 또 다른 화두를 계속 준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그 화두를 또 조차 다 탑 화했던 스님들이 찾아오면 탁! 질문을 던진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딱 봐도 그 제자가 여법한 법에 맞는 '아, 이 사람이 분명하구나' 할 만한 답을 딱 내린다는 말이에요. 그 답을 딱 내린 사람에게 조차 밝은 스승은 뭐라고 하냐면? '아니야, 이래요.' 이건 누가 봐도 100% 맞는 얘기를 했는데 '아니야, 이래요.' '아니야, 이런다는 말이에요.' 그 지점에 가서는, 그게 그 사람을 또 한 단계 더 공부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끊임없이 공부해 가는 거예요. 20년, 30년 저도 그렇게 공부하고 있는 중이에요. 여러분과 함께, 제가 여러분보다 모르긴 해도 그럴 거예요. 제가 여러분보다 어찌 보면, 저보다 더 수승하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이렇게 한 발 앞서 있으니까 여러분이 제 말을 듣기가 편하실 거예요. 어쩌면 똑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나 정말 이 공부에 대한 정말 정말 믿음, 믿음의 쏭치거 든요. 정말 이 공부에 대한 믿음이 너무나도 단단해져요. 그리고, 여러분 이런 측면이 있어요. 제가 여러분, 이렇게 뭔가 공부 엄청나게 된 것처럼 이렇게 가끔 어쩔 수 없이 얘기할 때가 있어요. 근데 그게 내가 정말 막 그렇게 돼서 그런 게 아니라 좀 전에 그 말씀드렸죠. 공부를 하다 보면, 한편으로 보면 공부가 정말 많이 된 것 같고 뭔가 정말 괴로움이 사라진 것 같고요. 집착도 없어요.

 

그리고 현실에서 크게 원하는 것도 없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그러나 현실에 열심히 살고 정말 자유롭다는 걸 정말 느껴요. 그리고 이렇게 살다 죽으면 되겠네. 죽음도 두렵지 않네 이런 측면들이 있다니까요. 공부하면서 이런 측면들이 분명히 한 측면이 있어요.

 

그리고 내가 과거에 비해서는 정말 내가 많이 달라졌다. 그런 측면들이 있어요. 한편으로는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경계에 부딪히면 그 경계에서 또 왔다 갔다 하는 측면들도 분명히 있어요.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있어요. 그게 보리고 살타예요. 보리 살 탄 거예요. 저도 여전히 공부하는 보리 살탄 거예요. 이런 보리적 측면이 있고 살타적 측면이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을 보리적 측면으로 자꾸 이끌어오게 하려고 하니까 보리적 측면에 얘기를 자꾸 하는 거예요. 제가 공부가 다 돼서 이런 측면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저에 있는 보리적 살타적 측면 중에 보리의 측면을 자꾸 얘기함으로써 이끌어들이는 것이죠. 제가 완벽하게 공부 끝나서 그렇게 얘기하는 게 아니고, 저도 끌려가다가 돌아오죠.

 

현실에서는 끌려간단 말이에요. 끌려간다. 그런데 옛날에는 왜 끌려갈까? 아직 공부도 미진한 녀석 같으니라고 이 공부가 미진하니까 끌려가는 거 아니겠어하면서 자괴감에 빠졌다면, 그냥 볼뿐이에요. 미소 뜨면서 그냥 바라볼 뿐이에요. 열마 미소로 그냥 웃으면서. 문제 삼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문제 삼을 필요가 없어요.

 

그걸 문제 삼는 그 마음이 문제지. 내가 하는 공부가 아닌데, 누구를 가지고 공부가 잘 됐니 못 됐니 할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모두에게 똑같이 할 거예요. 여러분들도 공부가 어느 정도 된 측면도 분명히 있고, 그래도 여전히 미진해하는 측면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그렇죠? 그렇게 공부해 가는 거예요. 그게 10년, 20년 더 계속할 거예요. 그러니까 각오를 하고 공부하세요.

 

그러나 분명히 한 측면에서는 든든한 어떤 안도감이 점점 깊어질 거예요. '죽어도 상관없겠구나' 하는 안도감, '미래가 두렵지 않은 안도감', '미래가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겠구나' 하는 안도감. 내가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 되는 기준이 없으면 어때요? '이래야 돼, 저래야 돼'가 없으니까, 그냥 이대로 안심이라는 게 이제 가슴으로 점차 소화가 된다니까요.

 

그러면 미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에요. 미래 계획 다 있어요, 꿈 다 있어요. 그런데 그 꿈을 절대 실하지 않아요. '돼도 좋고, 안 되도 좋고. 내 인연만큼 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인연만큼 되겠지.' 그러니까 내 인연을 처해했을 때 열심히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옛날에 선사 스님들의 이야기 보면, 전부 다 어떻게 얘기하시냐면 '인연을 만나면 베풀고, 인연이 없으면 그냥 쉰다.' '인연이 만나면 그 인연에 부딪혀서 그 사람을 도와주고' 이러면서 사는 거예요. '인연이 없으면 그냥 푹 쉬는 거예요.'

 

제가 아는 어른 스님께서 한때 막 열심히 포교를 하시고, 어쨌든 막 뭔가 바꿔보겠다고 불교를 바꿔보겠다고 열심히 공부도 가르치고 하시다가, 그냥 그 인연이 다해서 고요히 산에서 혼자 계시는 산에 그냥 계시니까 하루 종일 절에서 그냥 청소하면서. 공양에 드시면서 공양주보살도 없고 사무장도 없이 혼자 이렇게 다 하시면서 혼자 그냥 절 지키며 사셔요. 그래서 안타까웠어요.

 

이렇게 뭐랄까 안목이 훌륭하시고 밝으신 큰 스님께서 세상에서 법문을 들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그 법문 좀 들려주세요. 이렇게 했더니 뭐, 그냥 굳이 그런 생각이 아직은 없고 뭐, 또 그렇다고 해서 뭐, 그런 인연이 닿으면 안 하겠다는 생각도 없고 지금은 그냥 이렇게 살고 있으니까. 또 그렇게 살다가 그 인연이 안 되니까 인연이 아닌갑 보다 하고 쉬는 거다. 그러니까 크게 집착이 없단 말이에요.

 

포교를 반드시 해야 되겠다는 집착도 없고 반드시 하지 말아야 되겠다는 집착도 없단 말이에요. 인연 따라 할 때 되면 하는 거고 인연 따라 못할 때 되면 못하는 거예요. 어차피 다 때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집착이 없으면 어떻겠어요. 막 포교를 잘해야 된다는 생각도 없어요. 부처님이 진짜 붓다가 되겠다고 생각했겠어요.

 

불교 교세를 이렇게 확장해서 인도 전역의 불교를 교화해야지 그런 생각 있으셨겠어요? 내가 죽고 나도 2,500년이 지나도 불교가 전 세계에 유통되겠지 그런 생각 있으셨겠어요? 그냥 눈앞에 있는 인연 따라 인연 되는 사람을 그냥 눈앞에서 교화했을 뿐이겠죠. 그게 전부예요. 그게 정말한 거예요. 이미 완전했다니까요.

 

우리는 본래 이대로 이미 완전했구나를 깨닫는 거예요. 그러니까 깨닫고 나도 한 바퀴 돌아서 이 자리예요. 이 자리. 그러니까 한 발도 갈 일이 없어요. 지금 이 자리구나. 지금 이 자리에 안주를 하게 돼요. 공부를 하게 되면 할수록. 그래서 우리가 이제 임성수료 이런 말 있어요,

 

임성수료. 임성 성품에 내맡긴다 맡길 임자 성품 성자 성품에 그냥 탁 맡기게. 돼요 뭐가 성품이에요?, 삶의 그대로 성품이 드러나 있는 곳이에요. 삶의 그대로 내맡겨요, 내가 조작하지 않아요. 수류, 물을 따라 흐른단 말이에요. 흐름을 따라 그냥 간단 말이에요. 부제는 경전에 마른 통나무처럼, 통나무가 물을 흐르듯이 그냥 내맡기고 흐른다 하듯이, 삶이라는 성품에 내맡기고 따라 흐를 뿐 과도한 집착이 없어요.

 

반드시 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없고, 반드시 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없이, 지금 이렇게 벌어지고 있는 삶을 삶에 완전 내맡긴 채 살면. 아까 말씀하신 그 질문, 뭔가 공부가 되는 것 같아요?, 안 되는 것 같아요? 정말 그런 거예요? 지금이 전부잖아요?, 지금 완성된 상태 아니에요?, 지금 행복한 거 아니에요?, 지금 행복한 거예요. 지금 공부 끝난 거예요. 사실은 그런데, 내가 살아 있을 때는 여전히, 내가 꿈꾸던 공부가 잘 되는 모양. 그게 왜 안 나오지? 이런단 말이에요.

 

근데 그거는 끝끝내 안 나와요. 몸이 있는 동안은 유여의 열반. 이러잖아요. 완전 무여의 열반은 죽고 나야 반열반이라고 하잖아요. 몸뚱이가 있는 동안은 이 세상은 몸뚱이의 이치 즉 인과의 이치를 따라요. 부처님이 됐다고 물 안 먹었는데 목이 안 마를까요? 물 안 마시면 부처님도 목말라 죽을 것 같아요. 밥 안 먹으면 배고파요. 느끼한 거 먹으면 부처님도 뭔가 칼칼한 게 당기실 거예요. 얼큰한 게 땡기실 거예요.

 

똑같아요. 이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인과 그걸 턱 인정해 버리면 어때요? 삶을 이대로 완전히 수용해 버리면 어때요? 이대로 완전히 허용해 버리면 어때요? 지금 여기서 문제 해결됐어요. 사실은 자기 생각이 자꾸 문제가 해결 안 된 것처럼 우기는 거지. 난 돈을 더 벌어야 돼하는 생각만 없으면 지금 이대로. 원시시대 사람들보다는 훨씬 부자잖아요.

 

인도에서 아프리카에서 다 죽어가는 사람보다는 우리는 훨씬 부자잖아요. 뭐가 바랄 게 있어요? 그러나 최소는 다 해요. 근데 뭐 돼도 좋고 안 돼도 좋다 하고 산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냥 행복한 거예요. 이렇게 우리는 뭐랄까 깊은 반야바람 일다를 행하게 되면 반야 지혜를 행하게 되면 지금 여기에서 내가 뭔가를 바꾸고 나서 행복해지는 게 아니에요.

 

지금 내가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공부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그걸 그대로 인정하단 말이죠. 인정하는 데부터 공부가 시작돼요. 내가 부족한 것을 그냥 인정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래 나 못났어 나 좀 부족해, 나 남들 앞에서 좀 이렇게 움츠러들어, 나는 좀 공황장애가 있어, 나는 우울해, 나 우울증 있어, 난 학력이 좀 부족해. 그냥 인정한단 말이에요. 인정한다. 인정하고 나 부족하면 인정한다. 척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남들 앞에 막 과도하게 척하려고 하고,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그게 자기가 살아 있으니까 계속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나를 완전히 그냥 허용한단 말이에요. 내가 못났으면 허용한단 말이에요. 제가 우리 절의 신도님들한테는 심심치 않게 나는 땡중이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왜? 저를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보는 사람한테는 제가 무슨, 제가 그런 공부 도인이겠어요?

 

저 같은 땡중한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과찬을 하십니까? 저는 진짜 훌륭하신 스님들 얼마나 많은데 전 정말 존경스러운 스님들, 우리나라에 정말 많아요. 저는 그런 스님에 비하면 저는 정말 못났다 싶어요. 제 스스로도 그런데 제가 그냥 인연이 이렇게 말하는 습관이 되니까 또 이렇게 인연으로 법회를 할 수 있을 만한 인연이 되니까, 제가 그 인연을 만나니까, 그냥 인연을 만나니까 이렇게 베푸는 것뿐이지. 그 인연이 그냥 저에게는 이렇게 온 것뿐이지. 제가 잘나서 그러는 게 일체 정말 없습니다.

 

그러니 삶을 주어진 삶을 그대로 허용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이 장미면 장미인 대로, 꽃다지면 꽃다지인 대로, 화려한 꽃이면 화려한 꽃인 대로 그걸 그대로 인정하고 나면, 세상은 화음, 화음은 장엄한 꽃들의 정원이란 말이야. 이 세상 온 우주가 볼품없는 꽃과 화려한 꽃이 있어야 돼요. 동시에 함께 있어야 돼요.

 

소나무와 참나무가 함께 있어야 되고,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키 큰 사람 키 작은 사람 모두가 있는 이대로 그렇게 있는 것이 지금 나로서 있는 것이 그게 바로 화음이에요. 화음 화음의 만다라 꽃이거든요. 그게 바로 부처님이에요. 내가 이렇게 사는 게 아니라, 부처님이 이 모습으로 이렇게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마다 자기를 싫어하는 거는 부처를 싫어하는 거예요. 부처를 죽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부처를 살려내야 돼요. 나답게 사는 게 자기 부처를 살리는 거예요. 지금의 이 나를 완전히 인정하고 허용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해 주는 것, 그게 나로 살아있는 이 부처를 우리가 공략하고 공경하고 찬탄하고 공략 올리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