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자식이 사위나 며느리 감을 데리고 올 건데, 이게 막 그냥 저놈이 어떤 사람 될 걸까, 우리 집안에 사회 면허가 누가 될 거냐에 따라서 우리 집안에 정말 성패가 좌우될 것 같고, 막 자식이 불행해질 것 같기도 하고. 막 그런 압박감을 가지고 있으면 되게 긴장한다 말이에요: 근데 인연은, 우리는 좋은 사람을 만나야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이 지구별의 80억 인국 가운데 몇 명이 결혼에 성공할까요? 결혼에 성공하는 사람 많지 않을걸요.
자연스러운 인연의 중요성
아마 진짜 좋은 사람, 이상적인 좋은 사람을 만나야 되는게, 정상이라면 안 그렇다니까요. 우리는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야 되는 게 아니라. 자기와 인연이 맞는 사람을 만나야 되는 거예요.
인연이 남편인 사람을 만나고, 인연이 아내인 사람을 만나야 되는 거지 좋은 사람을 만나야 되는게 아니에요 그게 자기를 위해서 좋은 거죠, 왜냐하면 모든 게 완벽했으면 좋겠는데 싶지만 불안전하고 불확실하고. 이런 사람을 만나서, 함께 어떻게 성장하고, 함께 커가고 하면서 뭔가 배워갈 수도 있고요, 또 함께 고통스럽고 괴로워하는 걸 통해서 업장을 소멸할 수도 있고요, 함께 업장을 소멸하다 하고 약속하고 이 땅에 온 커플일 수 있단 말이에요.
이 부처님 경전에 그래 나오거든요 부처님께서, 어디에 태어날까? 당신이 다 계획해서 태어났다, 그러시잖아요. 그래서 인도에 어떤 카필라 국에 태어나고. 거기서 부처님은, 그 교화를 하시는, 그 능력이 탁월하시다, 모든 중생들의, 높고 낮은, 모든 계층에, 모든 사람들을 다 교화할 수 있으세요.
왜냐면 왕자 수벌 받아서, 왕들을 교환하는데 말하고 이러는 것이, 그 수준이 전혀 떨어지지 않았죠, 상당히 유능했던, 근데가 또이 6년 동안 고행의 길을 걸으면서, 그야말로 걸식하는 모든 사람들의, 또 어려움이나 이런 것들도 다 느끼고, 그들을 찾아다니면서, 이렇게 밥을 빌어서 먹어야 됐었고, 그러면서 그 모든 것들을 그 인연을 그렇게 교화하기 가장 적절한 인연으로 카필라 곡을 택해서, 그 왕과 왕비를 택해서 갔다는, 그런 말을 쓴단 말이에요.
어머니가 부처님을 낳자마자 돌아가시는 것조차 인연이었던 말이에요, 그 고통을 통해서 이 왕자는 어릴 때부터 왜 왕인데, 왕비였다 되지. 이거는 왕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거구나 죽고, 사는 문제는, 이런 어떤 근원적인 고민들을 할 수 있었단 말이죠.
출가에 대한 마음 품을 수 있었단 말이죠. 근데 그것을 보고선, 야 역시 부처님은 대단하다, 부처님 쯤 되니까, 막 저렇게 태어날 때, 어디서 태어날지, 딱 정해서 태어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근데 그게 하나의 방편의 말이에요. 말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소리거든요: 인연 따라, 그렇게 모든 게 인연에서 어긋나지 않는다는 말이겠죠. 그 부처님만 그러겠냐 말이에요, 자기가 부처든, 우리 모두가 그렇다는 소리거든요.
그니까 그걸 이제 구체적으로 좀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면: 우리가 다 이 부모님을 만나야만 했던 거예요. 내 마음에 안 드는 부모님이라도 돈 없어서 나를 뒷받침을 못해 주는 부모님이라 할지라도 그 부모님을 만났어야 되는 거예요. 부모님을 원망할 필요가 일도 없는 거예요. 왜 자기 인연에 없는 건 나타날 수가 없어요. 세상에 다 자기가 당긴 일이에요, 자기에게서 나온 일이거든요. 결혼의 인연도 마찬가지예요, 자기 직장 인연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어떤 인연인지 모르잖아요 우리가 직장을 내가 더 오래 할 수 있는지, 여서 그만둬야 될지를 모르잖아요. 모르니까 최선은 다해야 돼요, 최선을 다할 뿐, 그러나 모르니까 결과는 내맡기고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확실히 알 수 있냐? 알 수 없는게 진리예요. 알려면 안 돼요, 그 난 최선을 다 하는 것까지 그리고 그 결과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면 어떻게 돼요? 알 수 없으면 익숙해지면 어떻게 될까요? 마음속으로 집착은 안 하겠죠. 반드시 이 회사에서 오래 남아야 돼하는 집착을 안 하겠죠. 알 수 없으니까, 나는 알 수 없어 이거잖아요.
근데 누군 알 수 있어요. 이 법계를 알아요, 인연은 알아요, 그러면 인연이 알아서 하겠죠. 나는 모르는데, 법계가 아니까 법이 살아가도록 해야지. 내가 살도록 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근데 우리는 내가 살도록 하니까, 내 생각을 가지고, 내 생각이라는게 얼마나 조금밖에 모르는 거예요.
정말 이 인연법 전체를 내 생각으로 판단을 못 하죠. 내 안에 어떤 업이 있는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어요? 나는 모른다 니까요. 나는 어리석은 분별 망상하는, 어리석은 모르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내가 진리가 되면, 어떻게 될까요? 모름에 편안해져요, 모름을 당연하게 허용한다 말이에요.
나는 모른다 오케이,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삶이 어떻게 펼쳐지는 말을 안 해요, 어떻게 펼쳐져도, 상관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허용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여요. 즉각. 내가 삶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내가 삶을 받아들이면 둘로 쪼개지 내가 있고 받아들여야 될 게 있잖아요. 그건 진짜 받아들임이 아니에요. 그냥 이거는 저절로 저절로, 그냥 삶 전체가, 그냥 저절로 이렇게 흘러가고 있단 말이에요.
삶의 학습
그냥 통째로 받아들여지고 있잖아요. 받아들인다 말도 없이, 그냥 이 자체가 그냥 온전한 거예요, 틈없이 내가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했다. 그거는 아직 공부가 안 된 거죠.
그러니까 본래가 그런 거예요, 본래가 삶이, 이게 법인 거거든요. 법이 법으로서 그대로 이렇게 드러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내가 내 삶을 통제하려고 하는 거? 그건 어리석은 거예요. 내가 없는데 어떻게 내 삶을 통제합니다? 내가 세상을 어떻게 통제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탁 내려놓으면, 거기는 뭐 할 게 없어요, 그러나 아무것도 안 하지 않아요.
최선을 다해 살아요,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요, 열심히 사니까 될 건 되고, 안 될 건 안 돼요. 이게 진리예요 부처님, 인생 어땠어요? 될 건 되고, 안 될 건 안 됐잖아요. 부처님 인생 좋은 일만 벌어지지 않았잖아요 좋은 일도 벌어지고, 나쁜 일도 벌어졌아 그게 진실이라 그요.
부처님 인생 파란만장 있거든요. 태어나자마자 어머님이 죽었죠. 부처님 뭐 가족이 망했죠. 엄청나게 외도한 모함을 당했어요, 욕도 많이 먹었고, 쫓아서 깡패들 누가 붙여가지고, 부처님 나올 때마다 막 돌던지고 욕하고, 그런 일도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 일들이 있는 그게 부처님의 삶이에요.
화를 잘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법문을 들으러 고름처럼 몰려드는 일도 있었어요. 그니까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네요. 승승장구, 하고 술술술술 풀리기만 하지 않았네요. 그죠, 그게 우리도 부처님같이 사는 방법이에요.
지금까지 우리 삶을 보면, 슬 풀리기만 하지 않았잖아요. 어떨 땐 풀렸는데, 어떨 땐 안 풀렸 꽉 막힌 것처럼 안 풀렸어요 그것을 왜 허용하지 못했을까요? 그렇게 되면 안 된다 라는 자기 생각을 믿고 있었으니까 그 생각이 옳다고. 믿었으니까 그 생각 진짜 옳은 거 맞을까요? 모릅니다 어직, 모를 뿐이에요,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이 처 라고 했어요, 눈 깊고 효험 듯이 색성향미촉법 탁 만날 때, 그냥 뿐이에요. 뿐 내가 저것을 본다 이런, 이런 분별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그냥 볼뿐 들을 뿐, 삶을 경험할 뿐, 삶이 이렇게 경험될 뿐, 실제로는 일어남 사라짐, 그뿐이에요.
그러니까, 그 어떤 것도 나를 묶지 못해요, 나를 사로잡지 못해요. 내가 어디에도 묶여 있지 않아요, 족쇄에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이 처를 관하는 것을 대념처경. 이렇게 말해요.
수행자들이: 수행자는 여섯 내 입처, 여섯 외 입처, 법에서 법을 알아차린다, 어떻게 비구가 여섯 가지 안팎의 입하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비구는 눈을 알아차리고 형색을, 눈에 보이는 색깔, 형색을 알아차리며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일어난 족쇄,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는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고, 어떻게 사라지는지 안다, 사라진 족가 어떻게 하면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안다.
그는 귀를 알아차리고를 알아, 소리를 알아차린다. 이러면서 눈 깊고 혐 뜻을 다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눈으로 무언가를 보고, 보고 나서 여기 족쇄가 채워진 말이에요. 왜 어떤 계세요? 눈을 보고는 나는 자꾸 난 이런 거 좋은 거 보고 싶어. 좋은 사람은 자꾸 만나고 싶어. 싫은 건 보기 싫어. 소리를 듣고 난 이런 소리는 더 듣고 싶어. 칭찬은 더 듣고 싶어. 층간 소음을 듣고는 난, 이런 소리는 듣기 싫어 이 소리는 나를 죽이는 소리야, 난 겨라 죽을 것 같아. 이런 식으로 특정한 거를 선택해서 듣고 싶어 하고 특정한 건 듣기 싫어한단. 말이죠.
취사 간택시간 말이죠, 그것 때문에 괴롭잖아요. 그게 자기를 묶고 있잖아 사로잡고 있잖아요, 그게 인생의 족쇄 아닙니까. 그 족쇄는 누가 만든 거예요, 자기가 만들었어요. 볼 때는 볼 뿐이고, 들을 때 들을 뿐인데. 그렇게 뿐이 안 된단 말이죠. 보고 나서 해석하고 판단하고, 분별해서 좋은 거, 나쁜 거 해석하고, 좋은 건 더 갖고 싶어서, 안다라고 더 갖고 싶은데 못 가지니까 괴롭고, 싫은 건 내 인생에 없애고 싶은데 없어지지 않으니까 괴롭고. 그거 말고 다른 족쇄가 있습니까?
그 족쇄를 풀어 버린다면, 어떤 일이겠어요? 볼 때는 그저 보는 그 알아차림에, 들 때 듣는 알아차림 그뿐이에요 어떤 소리를 듣고 좋다 나쁘다라는 게 없단 말이에요, 그럴 뿐이란 말이죠. 냄새 막고 맛보고, 감정 느끼고, 생각 일어나고 사라 저요.
중도의 중요성
괴로움이라고 괴로운 이유는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는 이유는 괴로움 때문이잖아요, 괴로움을 해결하고 싶은 거잖아요. 그러면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통찰해 법의 안목이 생긴다는 건 뭐냐면 괴로움이 진짜인가, 괴로움의 문제 늙고 병들고 죽는다라는 걸 대표되는 사고팔고는 이 괴로움의 문제, 이것이 진짜인지를 깨달아야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괴로움을 해결하는 방법, 이 세상에서 전부 다 이거 해봐라, 저거 해봐라 염불 독해, 아니면 뭐 기도해라, 아니면 신게 부탁해라 뭐해라, 이렇게 방법 있잖아요. 그런데 이 불교에서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사성제 뭐라고 하느냐? 사제가 모든 불교를 포섭한다 그러거든요,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포섭한다 그래요.
첫 번째가 고성제 괴로움을 분노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하지 않고, 그걸 일단 잠깐 유보하고, 내가 괴로움이라고 이름 붙이는 그거, 그게 일어날 때 거기에 있어라는 거예요, 그걸 진짜로 보라는 거, 예요. 분별로 보니까 괴로움으로 해석되지아요, 괴로움이라고 해석됐다 어떤 일이 벌어지아요, 근데 그게 내 해석일 뿐 아니면 진짜 괴로움이 맞는지를 통찰해 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괴로움이 있을 때, 괴로움을 피해 도망가려고 하는 것은 괴로움을 더 강화시키는 일이에요. 왜냐면 괴로움을 볼 때, 괴로움을 피해 도망가야 되라는 의식이 크면 클수록 괴로움은 도망쳐야 될 것이, 괴로움의 어떤 의미를 강력하게 부여한 거잖아요.
내가 어떤 대상에 강력한 괴로움이라고 내가 부여해 가지고, 거기에 내가 드리어 집어삼킨다 말이죠.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괴로움은 더 나를 옥죄는 것으로 작용을 해요, 더 큰 족쇄가 돼 버려요. 뭐든지 마찬가지예요.
다이어트하겠다, 가볍게 하면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데 절대적으로 해야 돼하고 집착을 하면 안 먹어야지 하는데, 집착하다가 나중에 폭식증으로 바뀌죠. 거식증이 폭 식,으로 이렇게 왔다 갔다 하거든요, 한쪽에 극단을 쥐고 있으면 상대 극단이 덩치를 켜고 있단 말이야. 그래서 순식간에 나를 집어삼켜 버 려요.
그래서 불교는 괴로움을 없애 버리는 거, 싸워이기는 거, 그런 걸 하지 않아요. 괴로움이 있을 때 괴로움이라고 이름 붙임. 내가 이름 붙이고 있잖아요.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있어 보는 거예요. 그걸 그냥 허용하고 인정하고, 그거를 해석하고 판단하고, 분별하지 않은 채 그걸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보는 거예요.
내가 괴로워 아니라 그냥 지금이 상황 속에 그냥 있는 거예요. 이걸 말로 하니까, 알아차린다 허용한다, 이러지만 이 말은 곧 무슨 말이냐면? 하나가 된다는 뜻이에요. 알아차린다는 건 진짜 알아차리면,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는 게 아니에요, 그냥 알아차릴 뿐이란 말이에요.
내가 저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그냥 이것뿐이거든요. 그러듯이 내가 괴로움을 알아차린다 이러는 게 아니에요, 그건 다 분별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거기에 그냥 있어 보는 거야, 거기 그냥 있으면, 이걸 괴롭이다라고 해석하기 이전에 그냥 그 속에, 그냥 온전히 있게 된단 말이야, 그걸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저절로 통찰하면서, 저절로 알아차리면서, 그게 괴로움이라고, 성스러운 진리가 되거든요.
내가 괴로움이라고 해석하고, 이것 때문에 해석하고, 이걸 없애버려야 되라고 하고. 그러면 그것은 괴로움이 되어서 나를 집어삼킨다. 그런데 그 성스진인 줄 알고 해석하고, 판단하지 않고, 그냥 거기 있을 때, 그때 그것은 성수로 진리가 돼 버린단 말이에요.
삶 자체가 통으로 진리가 돼, 버린단 말 괴로움이 본래 없으니까, 괴로움은 나의 해석일 뿐이니까. 그런데 그것을 내가 해석해 가지고, 이건 좋고, 저건 나빠, 이렇게 분별하는, 그 괴로움이 괴로움으로 작용한 것뿐이잖아요.
불길을 막 뜨거운 불길이 있어서, 그 불기를 피하고 싶어 죽겠단 말이에요 그대 스님에게 제자가, 뜨거운 불길 있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어디로 피하면 되겠습니까? 했더니 불길 속으로 피해라. 이랬단 말이에요.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거는 더 죽는 일 같잖아요. 근데 불길 속으로 피하라 그랬단 말 불길 속으로 가는게 진짜 피하는 거예요. 왜 불길 주변에서 불길 때문에 뜨거워 죽겠다고 하면 옆에 있으니까 둘이니까 뜨겁잖아요, 근데 불길속으로 들어가서 불이 버리면 어때요 불은 불이 뜨거운 줄 알아요, 조금이 없어요, 그냥 그럴 뿐이지.
괴로움이 있을 때, 그 괴로움에서 도망치다 벗어나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괴로움을 거기, 그 현장에 있는 거예요, 그 있는 그대로 본단 말이에요.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 왜 괴로웠는지? 집성제 고성제 집성제, 집성제 드러난다. 아, 내가 생각으로 이런 일이 벌려야 지고, 더런 일은 벌어지면 안 돼, 이건 괴로움이,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 돼, 이런 식으로 내가 분별 있기 때문에 벌어지면 안 돼라는 한 생각 때문에 그게 벌어지니까 괴롭잖아요.
삶 전체가 그냥 통찰하는 것뿐이거든요, 있는 그대로일 뿐이거든요, 그 허용하게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 생각 분별을 쥐지 않아요, 분별을 쥐니까 괴로웠다 말이에요, 분별심이 있으니까 결단 말이에, 그 분별심이 12가지로 나뉘는 걸 연기라고 했어요.
12가지 분별이 그냥 순식간 일어난단 말이에요. 분별을 주니까 괴로웠다 말이죠. 그러니까 분별하지 않으니까, 괴로움이 저절로 사라진단 말이죠. 그게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는 거예요, 그게 12 연기의 순간, 역관을 통해서 연기가 아, 이게 전부 다 통으로 분배일 뿐이었구나, 그럼 그 분별을 내려놓는다 말이죠.
수행은 억지로 갈고닦는 유의조작의 수행이 아니에요, 그 사는 게 수행이에요. 어떻게 사느냐? 어 승가에 몸을 담고 사는 거예요, 바른 법문을 꾸준히 듣는 거예요, 법과 함께하는 삶을 사는 거예요. 또 내가 그러더라도, 왜 수행이 필요하냐면 멸성제 한 번 멸했을 한번 내가 이 법의 자리를 한번 확인했다 할지라도 내가 누군지를 한번 확인했다 할지라도 법이 딱 드러났어요, 대문자 뒤 단마 됐단 말이에요.
그러면 저절로 중도의 자리에 딱 쓴단 말이에요, 중도 자리가 따로 있지 않아요, 치우치지 않으면, 끌려가지만 않으면, 그게 그냥 중도라고 이름 붙인 거지 근데 어디에도 어느 극단에 머무는 게 아니니까, 머물러 집착하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중도라 이름을 쓰고,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이 말을 쓰고 했던 것이죠.
그니까, 그러기 위해서는이 법문을 꾸준히 듣고, 또 법을 자꾸 이렇게 뭐 경전이나 어록 같은 걸 통해서든, 스승을 통해서든이 공부를 계속하고, 법문을 계속 듣는 걸 통해 내가 평소에 또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하느냐? 공부를 계속하는 것을 하고, 또 일상에서는 저절로 관이 되는 측면이 이제는 드러납니다.